


이 아름다운 일본여자
그녀는 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는걸까? 벗고 있는 걸까?
5년 전 즈음 처음으로 우연찮게 접했던 이 그림 한 장.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너무 아름다운 이 옷, 쨍한 남색과 검정색 그리고 살짝 비틀어진 그녀의 몸 구도 그리고 한복처럼 풍성하게 부풀린 기모노의 부드러운 곡선미.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 하나, 바로 이 문장이다.
내가 최근에 본 그림 중 단연코 1등인 이 작품. 궁금했다. 누가 만들었는지, 언제 만들었는지, 왜 만들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사람들은 사진을 본다. 그리고 그림을 본다. 나는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그림을 그린 예술가의 심정을 온전히 느끼고 싶기에 나는 감정이입을 하며 한 예술가의 작품을 바라보며 같이 공감하는 것을 즐긴다. 이 그림이 그랬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당신은 한 그림을 볼 때 그림의 제목과 설명을 먼저 읽는가? 나는 우선 제목을 보지 않는다. 설명도 읽지 않는다. 그저 한참을 바라보며 그 그림 속에서 한 예술가가 표현하고자한 그 한 순간을 찾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어떤 그림은 특히 현대 추상화 같은 추상적인 그림은 아무리 내가 그 예술가의 표현을 이해하려 해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그런 그림들도 있었기에 나중에 제목과 설명은 반드시 읽는다. 온전히 그가 그녀가 표현하고자 했던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이 그림은 카츠카와 슌센(勝川春扇, 1762–1830년경)의 《용 문양 우치카케를 입은 오이란》(Courtesan Facing Left)이다. ca. 1830–1840년경, 카케모노에 목판화. 대표 소장처: 미국 Fine Arts Museums of San Francisco, Legion of Honor, Achenbach Foundation for Graphic Arts. 원제는 《왼쪽을 향하는 유녀》이며, 동일 판본이 대영박물관 등 여러 기관에 분산 소장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팩트가 있다.
그녀가 입은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그 기모노가 아니다. 우치카케(打掛)다. 기모노는 허리에서 코시히모로 묶는다. 몸을 원통으로 만들어 굴곡을 죽인다. 하지만 우치카케는 묶지 않는다. 어깨에 걸치고 바닥에 끄는 예장용 겉옷이다. 신부와 오이란만이 입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 던진 그 질문이 다시 유효해진다. 입은 건가, 벗은 건가? 묶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 옷의 멋드러진 남색 용은 그녀의 가슴에서 엉덩이까지 그대로 흘러내린다. 이 쨍한 남색은 에도 후기 서양에서 들어온 베로 남색(bero-ai, 프러시안 블루)이다. 가장 비싸고, 가장 진한 파란색. 요시와라 최상위만이 쓸 수 있었던 색. 요시와라 (吉原, Yoshiwara)란 에도 (지금의 도쿄) 외곽에 있던 일본 최대의 유곽, 공인된 홍등가다. 1617년 막부가 "창녀들을 한 곳에 모아 관리하겠다"며 만들었다. 그냥 창녀촌이 아니라, 에도 시대의 판타지 월트디즈니였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안의 도시. 들어가려면 문 하나를 통과해야 했다. 그 안에는 3,000명이 넘는 유녀가 살았다. 밖에서는 살 수 없는 술, 패션, 예술이 그 안에서만 허용됐다. 에도 남자들은 월급을 모아 일생에 한 번 요시와라에 가는 게 꿈이었다.
계급이 철저했다. 돈 없으면 길에서 서서 손님을 끄는 하시죠로(端女郎). 돈 있으면 방에서 손님을 받는 츄우산(中散). 그리고 맨 꼭대기가 오이란이다.
오이란은 손님을 고른다. 손님이 오이란을 고르는 게 아니다. 손님이 돈을 내고 3번을 와야 만날 수 있다. 첫날은 얼굴만 보고 가고, 둘째 날은 술만 마시고 가고, 셋째 날이 되어야 같이 잘 수 있다. 그 정도로 귀한 존재다. 그래서 그녀들만이 용이 그려진 남색 우치카케를 입을 수 있었다. 용은 에도에서 남성, 권력, 장군의 상징이다. 그걸 여자가 입는다는 것 자체가 "나는 이 요시와라의 왕이다"라는 선언이었다.
그래서 이 그림 속 일본 여자는 그냥 예쁜 여자가 아니다. 1830년대 도쿄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권력 있고, 가장 욕망받는 여자였다.
유녀(遊女, yūjo)는 노는 여자를 뜻하며 일본에서는 창녀의 총칭이다. 계급은 이렇게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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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녀(yujo): 제일 넓은 의미, 그냥 몸 파는 여자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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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란(oiran): 그중 최상위. 요시와라에서만 쓰는 호칭. 신분 높고, 손님을 선택할 수 있는 여자. 그녀가 여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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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샤(geisha): 몸 안 팔며 예술을 파는 여자
그녀는 유녀 중에서도 오이란이다. 용을 입을 수 있는 건 오이란뿐이었으니까.

이 아름다운 조선(현재 한국)여자
그녀는 서 있으려 하는 걸까? 앉으려 하는 걸까?
이 그림은 신윤복(申潤福, 1758–1813 이후, 사망 시점 미상), 호 혜원(蕙園). <미인도(美人圖)>, 혜원풍속도첩(국보 제135호)과 동시기인 ca. 1800–1805년경. 비단에 채색 육필화, 현재 보물 제1973호로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하고 있다.
조선 후기 풍속화 양대산맥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 혜원. 그의 <미인도>는 조선에서 여인의 전신을 단독 주인공으로 그린 거의 유일한 작품이다. 초상화 기법으로 머릿결 한 올까지 묘사하고, 배경을 싹 지워버렸다. 오직 여자 하나만 남긴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이 아름다운 조선 여자, 그녀는 서 있으려 하는 걸까? 앉으려 하는 걸까?
서 있는 듯 안 서 있는 듯 어정쩡한 자세. 무엇을 쳐다보는 듯 하나 무엇을 쳐다보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녀는 왼손으로 노리개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
일본 오이란이 살아 숨쉬는 용이 하늘로 오르는 듯 튀어나올 것 같이 표현했다면, 조선 미인은 한복 치마를 한껏 부풀려 여성의 곡선미를 극대화했다.
오이란은 묶지 않아서 야했고, 미인도는 너무 많이 묶어서 야하다.
조선 치마는 세 겹이다. 속치마, 겉치마, 그리고 그 위에 노리개. 묶고 또 묶어서 몸을 숨기는데, 그래서 더 보인다. 서 있으려다 마는 그 어정쩡한 굴곡이,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는 그 손가락 하나가 나를 미치게 한다.
나는 신윤복이 그린 육필화 미인도속의 기생과 카츠카와 슌센이 찍어낸 목판화속의 일본의 오이란이 겹쳐 보였다. 하지만 달랐다. 조선의 혜원이 붓으로 기생의 치맛자락을 들었듯, 슌센은 우치카케로 오이란의 굴곡을 꿈틀거리는 승천하는 용으로 찍어냈다. 조선과 일본, 그리는 형식은 달랐으나 그 둘의 욕망은 같았다.


같은 목판화 다른 느낌
당신은 어느 쪽 그림이 더 맘에 드는가?
5년전 즈음 내가 제일 처음 접했던 그림은 오른쪽 쨍한 남색의 용 문양 오이란이었다. 그 때 당시의 감흥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너무나 강렬했기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때 그 순간의 기억들
그저 목판화겠거니 신윤복의 미인도와 비슷한 구도네 정도로 머물던 기억속의 그림 한장
그러다 시간이 지나 우연찮게 왼쪽의 같은 목판화지만 검정색으로 찍은 다른 작품을 접하게 된다.
카츠카와 슌센(勝川春扇)의 《용 문양 우치카케를 입은 오이란》(ca. 1810년경)이다. 여기서 ca.는 circa의 약자로 '경(頃)'이라는 뜻이다. 대략 이 시기라는 말이다. 일본 목판화는 연대를 찍지 않으니, 미술사학자들은 안료와 출판 방식으로 연대를 추정한다.
즉 오른쪽 작품보다 약 20년전에 찍혀진 목판화였다. 나는 여기서 충격을 받았다.
이미 20년전쯤에 이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에 한번 놀랐고 같은 목판이더라도 색깔이 바뀌었다고 이렇게 느낌이 달라지는가 하고 또 한번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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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검은 용: 스미(墨, 먹)와 아이가미(藍紙, 쪽빛). 쪽은 금방 바랜다. 그래서 칙칙하고 무겁다. 용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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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남색 용: 베로藍. 1830년대 이후. 바래지 않는다. 쨍하다. 용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1810년경에 초판이 찍혀진 이 슌센의 용 문양 오이란도, ca 1800-1805년경 그려진 신윤복의 미인도 그리고 이 두 예술가의 나이차 고작 4년
그리고 무엇보다 비슷한 구도. 출신 국가는 달랐지만 각자 자신의 나라에게 가장 유명한 조선의 기생, 일본의 오이란을 그렸다는 이 사실 자체가 나를 진정 흥분시켰다.
흥미롭지않은가?

이 두 작품의 비슷한 점, 다른 점을 찾아보며 혼자만의 취미생활로 만족하며 지내던 어느 날
난 이 작품을 접하게 된다.
카츠카와 슌센(勝川春扇)의 《호랑이 문양 우치카케를 입은 오이란》(ca. 1810-1820년경)
같은 사람이 그린게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그림 필력의 저하가 느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화려하지도 않았고 오이란 급에 맞지 않는 듯한 인상이 강했다.
이게 시작이었다.
그래서 난 상상했다.
만약 내가 미술학자라면
"만약 내가 미술학자라면, 이 그림에 대해 논문을 어떻게 쓸까?"
역사적 사실에 역사의 미스터리를 더하여 상상해본다면 그게 보편적인 상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라, 누구나 "어? 그럴 수도 있겠네?" 하고 같이 즐길 수 있는 발칙한 상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진짜 써보았다. 진짜 미술학도의 논문처럼.
전공이 전혀 다른 각 분야를 졸업한 한국계 호주인 디지털 크리에이터가 5년간 덕질한 끝에 쓴,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장난이자 저의 보편적 상상. 이제 시작합니다.
즐거운 상상 되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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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ital Creator / 상상 속 미술학자, Shane Lee @aushanelee
제목: 검은 기모노의 용: 카츠카와 슌센 《용 문양 우치카케를 입은 오이란》(1810년경) 재고찰
부제: 두 개의 미인도는 모두 국보다 - 1811년, 신윤복이 탔을 그 배에 대한 상상의 기록
저자: Shane Lee @aushane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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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토목환경공학과 (2003 졸업), 호주 르꼬르동블루 외식 조리(Commercial Cookery) (2011 졸업) & UTS 의과학(Medical Science) (2020 졸업)

초록
본 논문은 카츠카와 슌센(勝川春扇, 1762-ca. 1830) 작으로 귀속된 《용 문양 우치카케를 입은 오이란》(ca. 1810, Lyon Collection 데이터베이스 등재본, British Museum 유사본 소장)과 《호랑이 문양 우치카케를 입은 오이란》(ca. 1810-1820, 공공기관 소장 기록 미확인, 경매 유통본) 간의 현격한 기량 격차에서 출발한다. 동일 화가로 귀속, 유사한 구도, 1810년대라는 좁은 시간 폭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은 안료의 채도 유지 방식, 의복 실루엣의 형태학, 세필 필법, 목판 인쇄 기법, 미술 시장 유통 현황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슌센의 일대기에서 1820년대 후반 목판화를 중단하고 도자기 채화로 전향한 점은 동시대 우키요에 화가 중에서도 이례적이다.
본 연구는 정조대 이후 조선 후기 회화사의 시대상, 도화서 제도의 변화, 신윤복(申潤福, 1758년 이후) 《미인도》의 형식 분석, 우키요에 분업 시스템의 공학적 분석, 경매 데이터베이스 분석, 김홍도 화법과의 비교, 1811년 신미통신사의 대마도 체류 기록과 왜관 역관의 역할, 신윤복 외가 인척 관계에 있는 역관 피종정의 대마도 수행 기록, 부산 왜관의 안료 유통 경로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한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나아가 도화서에서 축출된 화가가 일본에 건너갔다면 어떠한 작품을 지참했을지에 대한 미술사적 추정을 덧붙여 총 두 가지 해석 가능성을 통합적으로 논의한다. 본고는 두 가설 중 어느 하나를 단정하지 않으며, 두 가지 해석 가능성을 병치하여 향후 연구의 단초를 제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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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 1 영감 가설: 슌센이 신윤복 《미인도》의 형식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일본 스타일로 재해석했을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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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 2. 추가 작품 반출 가능성에 대한 추정: 도화서에서 축출된 화가가 일본에 건너갔다면 동반했을 수 있는 추가 작품군에 대한 미술사적 추정
본고는 일본 우키요에의 예술적 가치를 폄훼할 의도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용 문양 우치카케를 입은 오이란》 계열은 British Museum 유사본 소장에서 확인되듯 기법적 완성도 면에서 이미 박물관급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음을 전제한다.
용 무늬를 입은 오이란? 이거 신윤복의 미인도랑 엄청 닮았는데? 기모노는 이렇게 풍성한 곡선의 미가 나올 수가 없는데 이거 뭐지? 하는 그 느낌. 물론 이 작품을 처음 접한건 이 검정색 초반본이 아닌 청남색의 1830-1840년경 또 다른 작품이지만 말이다 어쨋든 난 이 그림을 보고 헐 소리가 절로 나왔었다.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용 문양 오이란, 카츠카와 슌센 (1810년경)
1장. 천재는 같은 시기에 퇴보하지 않는다
1.1 카츠카와 슌센 일대기
카츠카와 슌센(勝川春扇, 1762-ca. 1830, 일명 슌코 2세)은 서적 및 우키요에 양식 목판화 디자이너로, 장르화, 풍경화, 서양식 원근법을 사용한 미인화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 림파파 화가 츠츠미 토린 3세 문하에서 슈린(春林)이라는 호로 수학하다 1806-1807년경(ca. 1806-1807) 카츠카와 슌에이의 제자가 되어 코지마치 슌센에서 카츠카와 슌센으로 개명하였다. 1820년 카츠카와 슌코 1세를 계승하여 2세가 되었다. 1821년경 이후 판화와 책 삽화 제작을 중단하고 도자기 채화에 집중한 것으로 보이며, 이 전향의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우키요에 시장의 경제적 요인이나 도자기 장식의 상업적 기회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되나, 그의 결정을 명확히 설명하는 문서적 증거는 없다.
[학술적 주석 - 도자기 전향의 이례성]
첫째, 동시대 우키요에 화가들의 작력 지속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호쿠사이(1760-1849)는 70대 이후에도 신작을 발표하며 목판화 제작을 지속했고, 우타가와 계열의 쿠니사다 등도 고령까지 판화 제작을 유지했다. 반면 슌센이 60세를 전후해 대형 니시키에 판화에서 소형 도자기 채화로 활동 무대를 옮긴 것은 카츠카와파 내에서도 이례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둘째, 1810년경 《용 문양 오이란》(Lyon Collection 데이터베이스 등재, British Museum 유사본 소장)의 제작 기법을 보면 전향의 간극이 더욱 두드러진다. 다판 다색 덧칠, 보카시, 키라즈리 등 당시 고급 기법이 집약된 사례에 해당한다. 이러한 수준의 기술을 구사한 이력이 있는 화가가 10여 년 후 판화 제작을 중단하고 도자기 채화에 집중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경제적 요인, 도자기 장식 시장의 상업적 기회 등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어 왔으나, 이를 명확히 설명하는 문서적 증거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셋째, 본고는 이 지점에서 하나의 해석 가능성을 검토한다. 만약 1810년경 《용 문양 오이란》의 제작 과정에 외부 원화자의 협업이 관여했을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협업 관계의 변화 이후 작품의 제작 방식이나 수준에 변동이 나타났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호랑이 문양 오이란》에서 관찰되는 기량상의 격차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물론 이는 현재까지 직접적인 문서 증거가 확인되지 않은 추정이며, 향후 추가 자료 발굴을 통한 검증이 필요하다.
판본은 슌센이 맡았고 그림은 외부사람이 맡았을 가능성을 생각했었다. 현재 우리가 쓰는 콜라보를 상상했다. 왜냐하면 용 문양 오이란같은 이런 최고급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자가 추후 호랑이 문양 오이란(1810-1820년경) 은 너무나 성의없게 만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최고의 예술가는 항상 최고만을 선보이는 것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나는 이때 떠오른 사람이 한명 있었다.

호랑이 문양 오이란, 카츠카와 슌센
(1810-1820년경)

1.2 김홍도 비교 - 천재의 필력은 좁은 시간폭에 붕괴하지 않는다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는 조선 최고의 화원이다. 그의 호랑이 그림을 보자. 《송하맹호도》와 《죽하맹호도》는 제작 시기가 수년 차이남에도 필력, 호랑이 근육 묘사, 수염 세필, 배경 처리에서 동일한 수준을 유지한다. 천재 화가의 기량은 좁은 시간폭 안에 붕괴하지 않는다. 이것이 미술사적 상식이다.
그러나 슌센의 1810년대 작품에서는 그 상식이 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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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1809년 작품군: 비교적 평면적 구성, 저채도, 원통형 수직 주름, 단판 위주의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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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년경《용 문양 오이란》(ca. 1810, Lyon Collection 데이터베이스 등재, British Museum 유사본 공공 소장): 다판 다색, 보카시, 키라즈리, 3중 덧칠 등 최고급 기법 총동원, 입체적 묘사, 종형 S자 실루엣, British Museum 유사본 소장에서 확인되듯 이미 박물관급 수작으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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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1820년경《호랑이 문양 오이란》(ca. 1810-1820): 다시 단판, 평면적 구성, 덧칠 기법 미사용, 수직 주름으로 회귀
동일 화가, 동일 구도, 동일 주제(맹수 문양 우치카케를 걸친 고위 오이란)임에도 1810년대라는 좁은 시간폭에 나타나는 이러한 기법적·형식적 격차는 단일 작가 내적 변화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며, 제작 주체의 변화를 포함하여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는 지점이다. 김홍도의 사례처럼 천재 화가는 그러지 않았다. 슌센의 사례는 동일인이 아닌 다른 필치의 개입, 즉 외부 원화자와의 협업 가능성을 추정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형식적 근거가 된다.

송하맹호도, 김홍도 (대략 1780년대 전후)
죽하맹호도, 김홍도 (대략 1790년대 이후)
1.3 간과했던 점 - 목판화라는 점: 명품과 보급품의 공존
앞선 1.2의 비교에는 필자가 간과했던 중요한 전제가 있다. 김홍도의 호랑이는 육필화(肉筆畵)이며, 슌센의 오이란은 목판화(木版畵)라는 점이다.
그러나 슌센의 1810년대 작품에서는 그 상식이 깨진다.
김홍도의 《송하맹호도》와 《죽하맹호도》는 조선 최고의 화원이 한 점만을 위해 붓을 든 결과물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육필화이기에 필력이 좁은 시간폭 안에 붕괴할 이유가 없다. 최고의 화원이 최고의 정성을 들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슌센의 두 오이란은 찍어내는 그림이다. 동일 원도(原圖)라도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명품이 되기도, 보급품이 되기도 한다. 목판화는 사본을 여러 개 만들 수 있으며, 제작 단가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판매할 수 있다는 것이 육필화와의 결정적 차이이다.
앞선 도판으로 제시한 두 작품을 다시 비교해 보자. 하나는 Lyon Collection 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되어 있으며 British Museum에 유사본이 공공 소장된 것으로 확인되는 ca. 1810년경의 《용 문양 오이란》으로, 다판 다색, 보카시, 키라즈리, 3중 덧칠 등 당시 최고급 기법이 집약된 고급 사양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현재까지 공공 기관 소장 기록이 확인되지 않고 경매 유통본을 통해 알려진 ca. 1810-1820년경의 《호랑이 문양 오이란》으로, 단판 위주에 덧칠 기법이 미활용된 보급형 사양으로 추정된다.
이 두 점을 나란히 놓고 보면, 1.2에서 제기한 기량 격차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출판사의 가격 분화 전략이다. 용 문양 오이란은 다판 다색, 보카시, 키라즈리, 3중 덧칠이 총동원된 럭셔리 명품 사양에 해당한다. 반면 호랑이 문양 오이란은 금박과 덧칠을 생략하고 단판 위주로 찍은 대중용 저가 사양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동일 도안을 고급과 보급으로 나누어 판매하는 것은 에도 출판업계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따라서 호랑이 문양에서 관찰되는 기법적 단순함이 슌센 개인의 기량 퇴보가 아니라 출판사의 의도적 상품 전략의 결과물일 수 있다.
둘째, 판목의 마모 현상이다. 목판은 소모품이다. 수백 장을 찍어내면 선이 뭉그러지고 세필이 무뎌져 더 이상 정교한 인쇄가 불가능해진다. 용 문양으로 이미 상업적 성공을 거둔 판을 계속 찍어내는 과정에서, 우리가 현재 경매 유통본에서 보는 호랑이 문양의 뭉툭한 선과 평면적 채도가 후기 인쇄본의 마모 결과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필자는 1.2에서 제기한 ‘기량 격차’를 슌센 개인의 퇴보로 단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용 문양이 박물관급 명품, 호랑이 문양이 대중용 보급품이라는 이중 구조로 이해한다면, 1810년대라는 좁은 시간폭의 격차는 작가론이 아닌 출판·유통론의 문제로 재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호랑이 문양 오이란》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해서 그 화가 본인의 수준이 떨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본고는 인정한다.
물론 이 해석 역시 현재 Lyon Collection 등재 이미지와 경매 유통본 이미지만으로 추론하는 한계가 있으며, 초판과 후판의 실물 비교, 잔존 판목의 확인 등 향후 실증 연구를 통한 검증이 필요하다.
1.4 유통 - 시장은 이미 원전과 저가 재판을 구분했다
앞선 1.3에서 추정한 명품과 보급품의 이중 구조는 유통 경로에서도 그 차이가 확인된다. 먼저 ca. 1810년경의 《용 문양 오이란》 유형은 본고가 확인한 범위 내에서 공개 경매 시장의 거래 이력이 확인되지 않는다. Lyon Collection 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되어 있으며 British Museum에 유사본이 공공 소장된 것으로 파악되는 해당 유형은, 현재까지 민간 경매 데이터베이스상에서 동일 사양의 거래 사례가 보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통이 제한적인 박물관급 사양에 해당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반면 ca. 1810-1820년경의 《호랑이 문양 오이란》 유형은 현재까지 공공 기관 소장 기록이 확인되지 않고, 경매 유통본을 통해 알려진 유형이라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용 문양의 박물관급 유형과는 유통 경로 자체가 구분된다. 이는 동일한 오이란 구도 내에서도 고급 다판본과 저가 단판본이 유통 단계에서부터 구분되어 평가되고 유통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는 현재까지 확인된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상의 이력에 근거한 추론이며, 향후 경매 카탈로그 원본 및 낙찰 기록의 추가 확인을 통한 검증이 필요하다.
표 1. 두 작품의 소장 및 유통 현황 비교

나는 나의 시선이 육필본 그러니까 이 그림을 붓으로 그리는 그림의 관점에서 보고 말았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다. 중고교 시절 역사 시간 배웠던 김홍도, 신윤복 풍속화가 정도로 기억하던 조선의 유명한 화가 두명 아닌가. 그 중에서도 신윤복의 미인도, 이 그림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그림은 붓이라는 고정관념이 나한테 무의식적으로 존재함을 깨닫게 된 계기였다. 말로는 목판화인걸 알면서도 그림은 신윤복의 미인도처럼 붓으로 그린 그림의 기준속에 갇혀서 호랑이 문양 오이란이 용 문양 오이란도보다 후대에 나왔다면 김홍도처럼 같은 필력 수준의 두 그림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나도 모르게 그런 고정관념을 적용하고 있던 것이다. 한국엔 목판화가 없다. 그래서 생소했다. 하지만 조사를 하면서 대중을 위한 작품, 명품 럭셔리 작품 이렇게 두 종류로 판매할 수 있는 목판화라는 특이점을 알게 되었고 또한 일본의 유통시스템도 찾아보게 되었다. 한 예술가의 걸작을 접하면서 내가 갖고 있는 좁은 시야가 터지는 경험. 이건 정말 경험해보지 않으면 정말 모른다. 정말 짜릿했다.
2장. 미인도와 용 문양 오이란의 형태적 동일성에 관하여 - 붓으로 착각한 칼의 기록
미인도와 용 문양 오이란의 형태적 동일성에 관하여
신윤복(申潤福)의 <미인도>와 카츠카와 슌센(勝川春扇)의 <용 문양 오이란>은 제작 배경과 소장처는 다르나, 조형적 형식에 있어 놀라울 정도의 동일성을 보인다.
첫째, 배경의 생략이다. 조선 후기 풍속화의 일반적 형식은 인물과 배경의 유기적 결합에 있다. 김홍도, 김득신의 미인도는 산수, 괴석, 가옥 등 구체적 공간을 배치하여 서사를 보완한다. 그러나 신윤복은 이러한 배경을 백지로 완전히 삭제하고 오직 여인만을 부각한다. 세상을 지우고 여인이라는 존재 자체에만 집중하게 하는 파격이다. <용 문양 오이란> 역시 동일한 구성을 취한다. 일본 우키요에 미인도의 정석은 기둥, 창호, 정원 등 실내 장식이 존재하는 것이나, <용 문양 오이란>에서는 모든 배경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에도 시대 우키요에에서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신윤복 형식의 영향 가능성을 시사한다.
둘째, 의복의 실루엣이다. 신윤복 미인도의 한복 치마는 종형(鐘形)으로 풍성하게 부풀어 있으며, 주름은 S자 곡선으로 유려하게 처리된다. 실제 한복 구조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곡선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상화한 필법이다. 일본 오이란이 착용하는 우치카케의 정석은 원통형 구조에 기반하여 주름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용 문양 오이란>의 의복은 수직 주름이 아닌, 조선 한복과 동일한 S자 곡선의 종형 실루엣을 보인다. 기모노의 물성을 무시하고 한복식 이상화를 적용한 것으로, 조선식 필법의 직접적인 이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우치카케의 원통형 구조를 무시한 S자 곡선의 적용은 일본 화공 집단 내부의 관성적 변형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셋째, 세필 필습과 농염한 채색이다. 세필로 이루어지는 섬세한 필선과 농염한 채색은 화가의 지문으로 작용한다. 특히 입술, 뺨, 옷고름에 점처럼 찍어 올리는 농염한 홍색과 눈썹, 머릿결을 그리는 극세필의 운용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채도를 극도로 높인 연지의 사용과 윤곽선 안쪽에 살짝 번지도록 하는 주법은 신윤복 작품 전반에서 일관되게 관찰된다. 이러한 특징이 한국의 보물 <미인도>와 일본의 <용 문양 오이란>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며, 이는 동일한 조형 어휘와 채색 감각을 공유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시각적 증거이다. 매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이러한 필습의 일치는 도상(圖像)의 전파 경로를 추정하는 단서가 된다.
넷째, 안면의 조형과 가체의 과장이다. 신윤복 미인도의 안면은 이마가 넓고 턱이 뾰족한 역삼각형 구도를 이루며, 눈은 가늘고 길게 옆으로 찢어진 삼백안으로 처리된다. 이는 다소 퇴폐적이고 농염한 인상의 구현이다. 특히 가체는 실제보다 두 배 이상 과장되어 높게 솟아 거대한 조형미를 형성한다. <용 문양 오이란>의 안면 역시 동일한 역삼각형 비례와 삼백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일본 오이란의 둥근 안면과 처진 눈매의 정석과는 전혀 다른 조형이다. 또한 일본식 마게는 통상 뒤로 낮게 묶이는 것이 원칙이나, <용 문양 오이란>의 머리형은 조선식 가체처럼 수직으로 높게 솟은 형태를 취한다. 안면의 비례와 가체의 과장 방식까지 일치하는 점은 두 작품이 동일한 미의식을 공유함을 보여주는 결정적 지점이다.
물론 본 고찰은 현존하는 도판 및 Lyon Collection 등 공개된 이미지를 통한 형식 비교에 기반하며, 안료 분석, 지질 조사, 낙관·인장의 실물 대조 등 자연과학적 검증을 통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미인도, 신윤복 (대략 1800년대 전후)
용 문양 오이란, 카츠카와 슌센
(1830-1840년경)
나는 착각했다. 슌센이 그린 그림은 붓이 아닌 칼이었다. 그 칼로 저 부드러운 곡선을 깍아 만들었다. 과연 쉬운 일이었겠는가? 붓으로 그린 그림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니다. 그가 신윤복의 미인도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나는 모른다. 하지만 이 그림이 보여주는 구도와 색감은 그를 연상 시키기에 충분했 었다. 그러했기에 가설1을 세우고 집요하게 찾아보기 시작했다. 신윤복이 표현했던 저 쨍한 청색을 나는 혜원전신첩에서 보았던 기억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뒤에서 더 자세히 하겠다.
3장. 카츠카와 슌센의 《용 문양 오이란》형식 분석
3.1 안료 형식: 조선 전통 쪽·연지와 베로 남색·주사의 비교
표 2. 안료 형식 비교

대상은 초판 자체가 아니다. 1810년경 초판에서 용 문양은 흑색으로 표현되었으며, 이는 당시 베로 남색의 고가로 인한 물리적 한계로 보인다. 본 연구가 주목하는 것은 1830-1840년대 후판에서 용 문양이 고채도의 베로 남색으로 대체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현상은 1830년대 아이즈리에(藍摺絵) 유행이라는 동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본 장에서는 그 기술적 측면을 분석한다. 한편 신윤복은 《혜원풍속도첩》(1805년경) 전반에서 이미 베로 남색 계열을 숙련되게 사용한 바 있어, 조선에서의 수용이 일본의 유행에 선행함을 알 수 있다. 다만 육필화와 목판화는 기법상 직접 비교가 불가하며, 특히 목판화에서의 덧칠 효과와 유사한 농담 조절을 육필화에서 구현한 《혜원풍속도첩》의 사례는 그 숙련도 측면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왼쪽: 신윤복 <쌍검대무>, 오른쪽: <그네> / 혜원전신첩(혜원풍속도첩) 중 - 간송미술관 소장 / 1805년경
이 두 그림에서 신윤복은 그의 미학 세계의 절정을 보여준다. 천연 안료인 쪽과 연지, 수입 고급 무기안료인 베로 남색과 주사, 거기에 먹까지 섞어 다채로운 색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 색의 사용법이 천재적이다. 주인공에게만 더 쨍한 빨강과 더 쨍한 파랑을 쓴다. 보는 이의 시선을 강제로 잡아버리는 것이다.
첫째 그림, 중앙에서 칼춤을 추는 여인이 주인공이다. 둘째 그림, 그네를 타려는 여인이 주인공이다. 그는 주사를 써서 쨍한 빨강을 만들었고, 그 빨강 하나로 시선을 확 잡는다. 이 특징은 후대 고사인물도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쨍한 빨강 옷의 동자승을 중앙에 배치하고, 나무를 이용한 삼각형 구도로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한 장 안에서 동자승을 먼저 보게 만들고, 주위 인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기게 만든다. 보는 이의 시선을 유도하는 그만의 천재적인 발상이 이미 이 그림에서 시작된 것이다.
왼쪽 칼춤 추는 쨍한 빨강 치마의 무희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오른쪽 무희가 보인다. 그녀의 치마는 연지로 채색되었다. 오른쪽 쨍한 빨강 치마의 여인을 본 이후, 시선은 자연스럽게 쨍한 파랑을 입고 머리를 길게 땋은 여인에게 옮겨진다. 신윤복은 비싼 안료를 주인공에게만 써서 특별함을 추구했다. 그것도 1805년경에. 이 사실 하나만으로 그가 얼마나 천재적인 색채 감각을 가졌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아울러 앞서 본 신윤복의 <미인도>에서도 그는 같은 문법을 쓴다. 전체는 쪽으로 차분하게 깔고, 겨드랑이에서 나온 가느다란 끈 같은 결정적 포인트에만 아주 소량의 주사를 썼다.
그리고 30년 뒤, 슌센의 <용 문양 오이란>(1830-1840년경)을 다시 보면 베로 남색을 썼고 약간의 연지가 보인다. 주사는 쓰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아이즈리에(藍摺絵, 베로아이를 주력으로 쓴 푸른 그림) 기법이다. 이유는 목판화의 실용성 때문이다. 1830년대 일본에서 베로 남색(베로아이)은 중국을 통해 대량 수입되며 가격이 내려가 대중화되었다. 하지만 주사(빨강)는 여전히 비쌌다. 수백 장을 찍어내야 하는 목판화 특성상, 비싼 주사를 쓸 수 없었던 것으로 예측된다. 그래서 후대에 제작된 <용 문양 오이란>(1830-1840년경)은 대중화된 베로아이를 주력으로 쓰고 연지로 보조하는 실용적인 선택을 했다.
신윤복의 미학 세계는 보면 볼수록 빠져든다.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 같은 시대 천재 화가 김홍도도 유명하지만, 색채 감각까지 겸비한 신윤복의 작품 앞에서는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3.2 안료 특성 비교
신윤복은 조선의 쪽, 연지 같은 전통 안료에 수입 고급 안료인 베로 남색과 주사를 섞어서 그의 그림에 아주 잘 반영한다.
쨍한 빨강은 주사(朱砂) or 석간주(石間硃)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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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분: 무기 안료. 수은 + 황 (HgS) / 산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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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유기인 연지/베니랑 다르게 빛에 안 바랜다. 500년 가도 그대로 쨍하다.
쨍한 파랑은 베로 남색(bero 藍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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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분: 무기 안료. 페로시안화철 (Fe₄[Fe(CN)₆]₃) / 프러시안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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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조선 후기 일본을 통해 들어온 수입품. 쪽빛과 다르게 깊고 투명하며 발색이 강하다. 18세기 이후 동아시아에서 가장 비싼 파란색이었다.
구별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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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분홍·살색인데 바랜 느낌 → 연지 / 베니 (유기, 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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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봐도 따가울 정도로 쨍한 원색 빨강 → 주사 / 석간주 (무기, 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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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맑은데 은은하게 빛나는 쨍한 파랑 → 베로 남색 (수입 무기, 고가)
표 3. 혜원 그림에 사용된 안료 특성 비교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춘화를 그려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신윤복. 도대체 어떻게 그렸길래, 얼마나 야했길래 쫓겨났을까. 그런데 위의 <쌍검대무>와 <그네>만 보더라도 답이 보인다. 이 정도로 색을 다루고 시선을 설계하는 사람이라면, 춘화를 그렸어도 그냥 야하게만 그렸을 리가 없다. 나는 상상했다. 그가 만약 춘화를 그렸다면, 이 색조의 사용과 감각적인 구도를 그대로 활용했을 것이라고. 쨍한 빨강과 베로 남색으로 주인공을 잡고, 다양한 구도를 사용해 서사를 만드는, 한편의 이야기가 있는 그림을 몰래 양반가에 팔았을지도 모른다고. 물론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다. 엄격히 금기시되는 것이었으니, 그런 위험한 짓을 할 리 만무하겠지만. 나는 상상했다. 그가 만약 그렸다면 분명 이렇게 그렸을 것이라는 상상. ㅎㅎㅎ 그가 그린 춘화가 너무 보고 싶지만 이제는 한국에서 볼 수없는 그림이라 참으로 속상하다.
3.3 의복 형식: 일본 우치카케의 수직성과 용 문양 오이란의 종형 실루엣에 대한 형태학적 고찰
일본 우치카케의 정석은 원통형 구조로 인한 수직 주름이다. 이는 기모노의 재단 특성상 필연적이다.
그러나 《용 문양 오이란》(1810년경)의 하단은 원통형을 벗어나 종형으로 풍성하게 부풀어 있다. 이는 일본 우치카케에서는 이례적인 형태이다.
주목할 점은 그 표현 기법이다. 이 부드러운 종형 곡선과 주름의 볼륨이 붓이 아닌 목판, 즉 칼로 새겨졌다는 점이다. 직선적인 조각이 주류인 목판화에서 이러한 유연한 곡선을 정교하게 구현해낸 것은 당시 장인의 높은 기술 수준을 보여준다.
반면 《호랑이 문양 오이란》(1810-1820년경)은 다시 수직 주름으로 회귀한다.
이러한 종형 실루엣은 앞서 살펴본 신윤복의 <미인도>, <쌍검대무> 등에서 보이는 치마폭의 표현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직접적인 영향을 단정할 수는 없으나, 형태적 유사성으로서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표 4. 의복 실루엣 비교

3.4 인쇄 기법 비교를 통해 본 유통의 지속성
이미 1장 1.4 유통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급형과 보급형은 유통 단계에서부터 구분되어 평가 및 유통되었다. 이러한 구분은 인쇄 기법의 비교를 통해 보다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슌센의 《용 문양 오이란》의 경우, 초판본으로 추정되는 1810년경 판본에서는 용의 문양이 먹색에 가까운 검정으로 표현된 반면, 그의 사후로 추정되는 1830-1840년경 재판본에서는 쨍한 청색으로 변화한다. 이는 1830년대 이후 베로藍(베를린 블루)의 수입으로 인한 藍摺絵(아이즈리에, あいずりえ) 유행 시기와 맞물린다.
작가의 사후, 유행을 좇아 출판업자가 수요에 맞춰 재간행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인쇄 색상의 변화 자체가 유통의 지속성과 시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표 5. 인쇄 기법 비교를 통해 본 유통 단계의 구분

3.5 그림 비교에서 다른 점으로 꼽히는 점 - 눈 밑 음영의 유무
그림 비교에서 다른 점으로 꼽히는 부분은 눈 밑 음영의 유무이다. 신윤복 《미인도》의 특징 중 하나인 눈 밑 음영(눈물점)은 농염한 미인도 표현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세필의 필습이다. 반면 슌센의 《용 문양 오이란》에는 이러한 음영이 나타나지 않는다. 본고는 이를 단순한 기술적 한계로 보지 않는다. 목판화에서도 胡麻摺り(고마즈리)와 같은 점묘 기법을 통해 미세한 점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 밑 음영의 부재는 결점 없는 백옥 같은 피부를 이상으로 삼는 우키요에 미인도의 표현 규범에 따른 선택적 생략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즉, 조선에서는 개성을 더하는 요소였던 점이, 일본에서는 이상미를 위해 지워지는 요소로 전환된 것이며, 이는 구도·색감·실루엣 등 형식 전반의 차이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3.6 배경 생략 구도 비교
배경 처리 방식에서도 형식적 유사성이 확인된다. 조선의 전통 화원인 김홍도, 김득신 등은 산수나 가옥을 배치하여 서사를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신윤복은 배경을 백지로 완전히 삭제하고 인물만을 부각하는 파격을 보인다. 슌센의 경우 역시 주목할 만하다. 기타가와 우타마로, 도리이 키요나가 등 일반적인 우키요에 미인도가 기둥, 창호, 정원 등 실내외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반면, 《용 문양 오이란》에서는 배경이 백지로 생략되어 있다. 이는 조선에서의 파격과 일본에서의 파격이 동일한 지점에서 만나는 형식으로, 배경 생략이라는 구도적 유사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두 작품 중
어느 것이 신윤복의 작품 같아 보이는가?
정답은, 둘 다 신윤복의 그림이다. 왼쪽은 1813년 기려도교, 오른쪽은 1811년 고사인물도다.
차이가 있다면, 왼쪽 기려도교는 신윤복 추정작이며 한국에서는 그의 공식적인 마지막 작품으로 대우받는다는 것이다.
근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앞서 말했듯 한 예술가의 화풍은 단기간에 이렇게 확 변할 수 없다. 오른쪽 고사인물도는 혜원전신첩의 쌍검대무나 그네처럼 그의 존재가 확실히 드러난다. 혜원전신첩의 연장선, 마치 부록처럼 보인다. 가운데 시선을 확 잡아끄는 동자가 입은 쨍한 빨강, 앞서 말한 주사로 포인트를 주고 몰래 누군가를 지켜본다. 그리고 그는 우리 시선을 아래로 옮기게 유도한다. 흰 도포를 입은 한 늙은 남자. 삼각 구도로 온전히 이 두 남자에게만 집중하게 만든다. 쌍검대무나 그네에서 봤던 시선을 끄는 그의 방식 그대로다. 1805년경 혜원전신첩과 1811년 고사인물도, 5년, 10년이 지나도 그의 스타일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관이 확장되었다. 이 그림의 배경 이야기는 조선이 아닌 중국이었다.
반면 왼쪽 기려도교는 보는 순간 왠지 모를 쓸쓸함, 처량함이 느껴지는 그런 산수화로 보였다. 눈길을 끄는 어떤 특징도 없었을 뿐더러 그저 평온한 어느 한 일상의 모습을 그린 그런 그림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만약 이 그림을 그린 이가 신윤복이 아니라 해도 믿어질 만큼, 이제까지 보여주었던 신윤복의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 혹자는 말한다. 말년의 쓸쓸함을 이렇게 자연을 그리며 유유자적 달랬노라고. 나의 생각은, 글쎄올시다.
4장. 1813년, 마지막이라는 말에 대하여
현재 신윤복의 최후작으로 알려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윤복 필 <기려도교> 등 행려풍속도 4폭'(계유년, 1813년 관지)에 대한 작가 추정 경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기려도교, 신윤복 추정 (1813년)
1. 대상 및 문제의식
해당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윤복 필 <기려도교> 등 행려풍속도 4폭'으로, '계유년(1813)'이라는 묵서 관지(款識)만을 근거로 신윤복의 55세 작품으로 추정되어 왔다. 현전 작품이 50여 점에 불과하다는 희소성 때문에 '최후작'이라는 상징성을 부여받아 온 측면이 있다. 다만 희소성 자체가 진위를 담보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여기서 작품명 앞에 붙은 '필(筆)'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술사 도록에서 '작(作)'이 작가 본인의 관서(款署)가 확인된 확정작을 의미하는 반면, '필'은 화풍과 필치를 근거로 해당 작가의 작품으로 보이나 본인의 직접적인 관서가 없는 추정작에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즉, 해당 4폭은 소장처 도록상에서도 이미 추정작으로 분류되어 있다.
무엇보다 혜원은 현전 작품 어디에도 제작 연도를 직접 기재한 예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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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款署): 작가가 작품에 직접 기재한 서명과 낙관을 의미하는 1차 제작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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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지(款識): 소장자나 후대 감식자가 내력이나 작가를 식별하기 위해 별지로 첨부한 2차 기록
본 작품의 경우 작가 본인의 관서는 확인되지 않으며, '계유년'이라는 관지에만 의존하여 작가가 추정되었다는 점에서 판단의 근거가 취약하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2. 필체와 낙관 형식에 대한 의문
혜원은 〈혜원전신첩〉 30점을 통해 비교적 일관된 필체를 보인다. 섬세하고 유려하며, 머리카락 한 올까지 살아있는 필선이다. 그러나 본 병풍의 관지(款識)는 필획에 골기(骨氣)가 결여되어 있고, 자형을 모사한 듯한 인상을 준다.
필세가 허부(虛浮)하여 혜원 특유의 응집된 필선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혜원 전작이 일반적으로 관서(款署)와 도인(圖印)의 결합을 통해 자존을 드러내는 형식과 달리, 본 병풍에서는 작가 본인의 관서와 도인이 확인되지 않는다.
1811년작 〈고사인물도〉가 ‘嘉慶辛未(가경신미, 1811년) 朝鮮國蕙園寫(조선국혜원사, 조선국의 혜원이 그리다) 京師畵員(경사화원, 수도 한양의 화원)’이라는 명확한 관서와 인장을 통해 자존을 드러낸 것과는 대조적이다. 참고로 여기서 寫(사)는 ‘그리다’라는 동사로, 필자 자신이 직접 그렸음을 밝히는 자존의 표현이다.
3. 화풍의 연속성에 대한 재검토
55세는 기량이 급격히 퇴보할 연령으로 보기 어렵다. 본 병풍에서 보이는 인물 처리나 공간 구성은 혜원의 전성기 작품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아울러 "궁핍하여 저잣거리에서 상업화를 그렸다"는 통설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상업적 목적이라면 수요가 높은 기녀, 풍속, 춘화가 우선되었을 것이다. 하필 수요가 적은 산수화를 4폭 병풍으로 그렸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특히 1811년작 〈고사인물도〉와 불과 2년 차이임에도 화풍의 변화 폭이 크다는 점은 주목된다. 〈고사인물도〉의 쨍한 수입 안료의 발색, 삼각형 구도를 이용한 몰입감, 동자를 활용한 연극적 연출과 비교할 때, 1813년 병풍은 그 밀도가 현저히 낮다.
4. 소결을 대신하여 - 재검토의 제안
본 고찰은 〈행려풍속도병〉을 단정적으로 위작이라 판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존의 '최후작'이라는 규정에 대해 필체, 낙관 형식, 화풍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재검토의 여지가 있음을 제기하고자 한다. 향후 정밀한 화학적 안료 분석과 비교 연구를 통해 보다 면밀한 파악이 이루어지길 기대하며, 본고를 갈무리한다.
그래서 나는 1813년을 덮기로 했다. 그림에 적힌 글씨와 도장이 다른 그림들과 다르다는 지적이 있다. 화풍도 다르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견과 논란이 있는 곳이다. 그건 내가 할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다툼이 없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가 분명히 살아 있던 해로. 아직 붓이 살아 있던 시간으로. 기록상 마지막으로 분명한 1811년으로. 나는 논란보다 확정을 믿기로 했다. 연도가 확실한 그림 한 점,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간 기록 한 줄. 그 둘이 만나는 지점에 혜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 이야기는 1813년이 아니라 1811년부터 시작한다.
고사인물도는 중국 삼국지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고사 삼고초려(三顧草廬)를 그린 그림으로 흰 도포를 입고 바위에 걸터앉은 노인은 초야에 은거하던 제갈량이며 쨍한 붉은 옷의 동자는 유비를 대신해 세 번이나 찾아온 초동의 전령을 상징한다.
유비가 세 번이나 초가집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신윤복은 단 두 인물로 압축했다. 설명은 생략하고 감정만 남겼다. 배경을 모두 비우고 삼각 구도로 오직 두 사람에게만 시선을 집중시킨다. 가장 긴장되는 순간, 현자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의 찰나다.
이 고사는 조선 선비들에게도 익숙했지만, 에도 시대 일본에서 특히 숭상되던 이야기였다. 일본 무사들은 제갈량을 군사(军师)의 신으로 숭상했고, 삼국지는 에도 무가(武家)의 필독서였다. 조선통신사가 이러한 중국 고사도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당시 교역의 맥락을 읽을 수 있다.
일본의 수집가가 소장하고 있던 이 『고사인물도』는 2008년 한 개인 소장가에 의해 구입되며 약 20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고, 2015년 국립고궁박물관 전시 등을 통해 공개된 바 있다. 현재는 소장처 사정으로 인해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정확한 소장 현황은 확인 중이다. 그가 조선의 이름 혜원이라고 남긴 마지막 작품의 행방은 여전히 많은 질문을 남긴다.
혜원이 그린 중국 고사 그림이다. 조선에서 양반과 기생을 그리던 화원의 세계관이 확장된 순간이다. 만약 그의 낙관이 없었다면, 이 그림의 원작자는 당연히 중국인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참 영리했다. 글귀에 ‘조선국혜원’이라 정확히 적어 놓는다. 조선의 화가 혜원이 그렸다는 것을. 마치 미켈란젤로가 피에타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은 것처럼, 후대 사람들이 혼동하지 않게 낙관과 함께 종지부를 찍어 놓은 것이다. 그것도 조선에서 소개하는 그림이 아닌, 일본으로 가는 조선통신사에 들고 간 그림에 말이다. 나는 그 문장에서 감탄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알리는 그 문장, ‘조선국혜원’. 나는 그의 표현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고사인물도, 신윤복 (1811년)
혜원은 화려한 남자였다. 그러한 천재가 길바닥에서 처량한 상업용 산수도를 팔았다는 통설은 그의 미학과 모순된다. 정조가 승하한 1800년 이후, 조선은 순조·헌종·철종 삼대에 걸쳐 세도정치에 좀먹히기 시작했다. 그 처참한 몰락의 서막을, 이토록 화려한 미학의 소유자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같은 시기 일본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메이지유신으로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고 있었으나, 조선은 성리학적 명분론에만 매몰된 채 세도가들의 밥그릇 불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이 즉위와 함께 세도정치를 타파했음에도 이미 국가의 기틀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진 뒤였다. 1813년, 순조 13년. 썩어 문드러지는 세도정치에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던 그 계유년에, 산수화라니. 평안도에서는 홍경래의 난으로 수천 명이 죽어 나갔다. 조정에서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내리던 해다. 썩어 문드러지는 세도정치에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던 그런 해에, 55세의 화원 신윤복이 배고파서 저잣거리에서 그림을 팔아야 했다는 사람이, 4폭짜리 산수 병풍을 둘러메고 유유자적 산수를 유람하며 행려풍속도를 그렸다고? 말이 되는가. 못마땅한 현실을 잊으려 그렸다고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의 스타일과 너무 달라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작품이었다. 궁핍한 자의 그림에는 궁핍이 묻어나야 한다. 그 시대의 그림에는 그 시대의 피비린내가 묻어야 한다. 그러나 이 병풍에는 아무 냄새도 없다. 그저 평온한 산수만이 있을 뿐이다. 불과 2년차 밖에 나지 않는 1811년 〈고사인물도〉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이 느낌적인 느낌. 더 이상 무엇으로 설명하랴. 설령 이 1813년 그림이 진품이라 해도, 도화서에서 쫓겨나 돈이 떨어져 안료도 구하지 못해 처량하게 그린 그의 말년작이라면, 이 처량함은 곧 탈출의 동기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묻는다. 1813년, 신윤복은 과연 조선에 있었을까?
5장. 1811년, 신윤복이 그 배를 탔을까? - 중인의 삶, 성리학의 이중잣대, 그리고 마지막 조선통신사
5.1 중인으로서의 신분적 한계와 예술가의 척박한 삶
신윤복(申潤福, 1758~?)은 조선의 중인 화가이다. 아버지 신한평 역시 도화서 화원이었다. 조선 사회에서 화원은 중인 신분이었다. 양반은 그림을 취미로 그리면 풍류로 인정받았으나, 중인이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하면 천업(賤業)으로 폄하되었다. 도화서는 엄연한 관청이었으나, 화원의 녹봉은 박했다. 작품은 양반가의 사랑방을 장식했으나, 정작 화원은 대문 밖에서 대기해야 했다. 작품은 귀하게 대접받지만 작가는 귀하게 대접받지 못하는 이중구조가 조선 예술가의 현실이었다.
5.2 1800년 이후 세도정치와 도화서 예산 삭감, 그리고 퇴출
1800년 6월 28일 정조 사망 이후 순조 즉위와 함께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며 도화서 예산은 삭감된다. 화원은 생계형 직업인이다. 제도권에서 배제된 화원이 생계를 위해 외부로 눈을 돌리는 것은 합리적 선택이다. 신윤복은 풍속화, 특히 미인도·춘화로 유명했다.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에서 미인도·춘화는 유배 대상이었다. 양반들은 은밀히 즐기면서, 드러나면 화원을 처벌하는 이중잣대가 존재했다. 정조가 살아있을 때는 묵인되었던 풍속화가, 순조 즉위 후에는 퇴출 사유가 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800년대 초반 음란 풍속 단속 기사가 늘어난다. 결국 신윤복은 도화서에서 퇴출된다. 정확한 퇴출 연도는 기록에 없으나, 『혜원풍속도첩』(1805년경)이후 공식 관직 기록이 끊긴다. 배고픈 천재 화가가 갈 곳은 없었다. 국내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팔 수 없었다.
5.3 조선과 일본의 법적·경제적 차이 - 용과 미인도가 돈이 되는 나라
조선에서 용(오조룡) 도상 묘사는 왕실 전유물로 엄격히 통제되었으며, 민간에서 무단 사용 시 처벌 대상이 되었다. 미인도·춘화는 음란물로 규정되어 유배 사유였다. 국내에서는 팔 수도, 그릴 수도 없는 그림이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용 문신이 최고의 멋(이레즈미)의 상징이었고, 춘화(슌가)·미인화가 최고의 고가 장르였다.
경제적 차이도 결정적이다. 조선에서 쪽빛·연지는 국내 자생으로 저렴하지만 퇴색이 빠르다. 일본의 베로 남색(프러시안 블루)은 나가사키 데지마를 통해 수입되는 고가의 무기 안료로, 200년이 지나도 쨍한 채도를 유지한다. 최고 화가가 최고 안료를 쓰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물론 1811년 일본 역시 에도 막부 말기의 암흑기였다. 막부의 사치 금지령으로 화려한 그림은 표면적으로 단속 대상이었다. 하지만 조선과 달랐다. 조선이 양반의 이중잣대로 몰래 즐기고 겉으로는 처벌했다면, 일본은 막부가 금지해도 거대 지하경제(야시장)가 존재했다. 에도의 거상, 야쿠자의 전신인 교토·오사카의 상인 조직들은 막부 눈을 피해 춘화와 미인도를 더 비싼 값에 거래했다. 금지될수록 값은 더 올랐다.
즉, 조선은 팔면 죽는 나라였고, 일본은 팔면 더 비싸지는 나라였다. 배고픈 천재가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1811년은 마지막 조선통신사 파견 연도이다. 기존 통신사선을 통한 물감 밀수 경로가 존재했던 시기이며, 역방향 이동이 가능했던 마지막 탈출구였다.
5.4 조선통신사 1811년 신미통신사 - 마지막 불완전 사행의 구조와 착안점
1811년 신미통신사는 조선과 일본 외교사에서 매우 특수한 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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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 신미통신사(辛未通信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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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 연도: 1811년 (순조 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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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김이교(金履喬, 1764-1832), 관복 고증 논란이 존재하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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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도쿠가와 이에나리(徳川家斉) 쇼군 습직 축하.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 국왕 세자 책봉" 축하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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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통신사와의 차이: 이전 11번(1607년∼1764년)은 모두 에도까지 갔으나, 1811년 사행은 에도막부의 에도성 화재, 흉년, 재정 부담, 일본 국내 혼란으로 인해 에도 입성 없이 대마도 엄원(厳原)에서 국서 교환만 하고 끝난 역지빙례(易地聘禮)다. 즉 불완전 사행이다. 이 불완전성이야말로 역이동 밀항이 가능했던 구조적 틈이다.
학술적 의미: 조선통신사학회 논문에 따르면, 1811년 이후에도 조선과 막부, 대마도 쓰시마번은 통신사 재개를 위해 계속 협상했다. "From 1811 onward, the dispatch of Joseon delegations was repeatedly postponed..." 즉 공식 사행은 끊겼지만 왜관(倭館) 라인은 살아있었다. 이는 1811년이 단절이 아니라 비공식 이동이 가능했던 과도기였음을 의미한다.
이 불완전성이 본고의 착안점이다. 에도까지 가는 공식 루트가 아니라 대마도 왜관 현장에서 역관들끼리 실제 협상이 이루어졌다. 일본 측 통역 오다 이쿠고로(Oda Ikugoro) 기록에는 부산 왜관 공식 기록에 나오지 않는 실제 교환이 상당량 존재했다고 조선통신사학회 논문은 적는다. 즉 왜관 역관이야말로 진짜 외교·밀무역 창구였으며, 인원 이동이 공식 기록에 남지 않고 은밀히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였다.
신윤복의 몰년 미상이 1800년대 초반이라는 점, 1811년 대마도 사행이라는 점이 겹친다. 그는 정식 수행원이 아니라, 역관의 인척 자격으로 대마도까지 가는 배에 몰래 탔을 수 있다.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사이 중간 기착지이며, 여기서 일본 측 배로 갈아타면 오사카, 교토, 에도로 갈 수 있다.
완벽한 사행에서는 도망칠 수 없다. 불완전한 사행에서만 도망칠 수 있다. 1811년은 그래서 마지막 탈출구였다.
5.5 외가쪽 친척 역관 피종정 – 대마도 수행과 사라짐
신윤복의 외가에는 피씨(皮氏) 성을 가진 역관 피종정(皮宗正)이 있었다. 조선 후기 중인 화가 가문과 역관 가문은 혼맥으로 긴밀히 얽혀 있었다. 도화서 화원과 부산 왜관의 역관은 모두 중인 계층에 속하며, 동일한 왜관 라인을 통해 활동했다. 조선시대 역관은 중인 중에서도 왜관 근무 경험이 있는 자를 중심으로 선발되었으며, 일본어 통역을 넘어 안료·서적·도자기 등 문물의 밀무역을 실질적으로 담당했다.
1811년 신미통신사(역지빙례)의 명단에는 정사 김이교(金履喬)를 비롯하여 제술관, 서기, 역관, 화원, 의원, 마두 등이 포함된다. 정원은 유동적이었으며, 당시 관행상 역관 가문은 녹봉을 받지 않는 사적 수행원인 권솔(權率) – 자제·인척·가노를 포함하는 – 을 공식 명단과 별개로 대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왜관 역관과 도화서 화원은 대표적인 권솔 운용 직군이었다.
본고는 피종정이 왜관 통역을 통해 일본 측 역관과 안료·서적 교역을 하던 인물로 추정하며, 1811년 사행에 통역으로 배석했을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는 1811년 음력 3월 부산을 출발하여 대마도 엄원(嚴原)에서 일본 측 대표를 만나는 자리에 통역으로 배석한다. 이 자리에서 그는 단순한 통역에 그치지 않고 조선 화공의 그림을 일본에 소개하는 브로커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통신사 귀환(음력 7월 부산) 이후, 『조선왕조실록』 1811-1812년 왜관 역관 명부, 대마도 쓰시마번 종가 문서, 오다 이쿠고로(小田幾五郎) 기록 등 현재 확인 가능한 공식 기록에서 피종정의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1812년 이후 호적·족보상에서도 삭제 혹은 누락된 것으로 보이며, 묘소, 사망 기록, 후손 기록 역시 확인되지 않는다.
본고는 이 점에 주목한다. 외가 친척 역관 피종정의 대마도 수행-귀환-사라짐. 그가 단순한 통역이 아니라, 배고픈 천재 외척을 데려가 일본의 화방(畵房)에 연결해 준 인물, 즉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브로커이자 비즈니스 디렉터였다면?
물론 물증은 없으므로 상상으로 제시한다. 외가 친척이자 역관인 피종정의 요청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 바로 앞서 언급했던 신윤복의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1811년)이다. 중인 네트워크에서 외삼촌(피종정)이 조카(신윤복)를 살리는 일은, 그 시대에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현재 전해지는 『고사인물도』의 제작 연도는 일본의 공식 사료와 한국 기록을 통해 교차 검증할 수 있다. 쓰시마번 문서, 『통신사일록』, 접대 기록 등 1차 사료에 따르면 마지막 조선통신사의 사행은 1811년(순조 11년) 신미통신사이며, 정사 김이교, 부사 이면구 일행이 쓰시마 이즈하라에서 접대된 것이 마지막이다. 피종정이 대마도에 간 해는 한국 기록상 1811년이다. 그가 고사인물도의 분본(粉本)을 가져간 해가 1811년이라면, 그 분본의 제작 시점 역시 1811년작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중요한 점은 사행의 일정이다. 1811년 역지빙례는 부산 출발(음력 3월)부터 귀환(음력 7월)까지 약 4개월의 체류 기간을 가졌다. 대마도 엄원에 머무는 동안, 정식 명단의 역관은 기록에 남지만, 녹봉 없는 권솔(權率) 자격의 사적 수행원은 공식 명부에 오르지 않았다. 즉, 피종정이 만약 권솔 신분이었다면 그의 이동은 사료에 남지 않는 구조였다. 정식 역관의 이탈은 외교적 사건으로 반드시 기록되나, 권솔(權率) 등 비공식 수행원의 이탈은 공식 사료에 남지 않는 구조적 특성이 있다. 만약 귀환 과정에서 병사(病死) 혹은 익사 사고로 위장 처리되었다면, 중인 신분인 그의 사망은 『조선왕조실록』 등 관찬 사료에 기록될 가능성이 낮다. 1811년 사행의 부산-대마도 체류 기간이 약 4개월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마도에서 선박을 교체하여 오사카, 교토 등지로 이동하기에 충분한 물리적 시간이 확보된다.
5.6 부산 왜관에서 베로 남색을 구해 이미 덧칠을 쓴 화가
신윤복은 이미 조선에서 일본 안료를 구해 쓰고 있었다. 《혜원풍속도첩》의 청색 치마를 보라. 조선 전통 쪽빛은 유기안료라 100년이면 누렇게 바랜다. 그러나 신윤복의 청색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쨍하다. 무기안료인 베로 남색(베를린 블루, Prussian blue, 顔料의 수입명 ベロ藍)의 특징이다.
어디서 구했나? 부산 왜관이다. 18세기 말 동래 왜관을 통해 나가사키 베로 안료가 밀수입되었고, 신윤복은 그 고가 안료를 사서 이미 덧칠(重褙, 덧칠 기법)으로 쓰고 있었다. 이는 혜원풍속도첩의 안료 분석에서 베로 남색 검출로 확인된 바 있다.
조선에서는 용을 그리면 역모, 미인도를 그리면 유배인데, 일본 왜관에서는 그게 돈이 된다. 신윤복이 일본 안료의 선명함과 일본 시장의 수요를 왜관을 통해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은, 그의 일본행 동기를 물질적 측면에서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다.
혜원의 몰년이 미상인 점은 주목할 수 밖에 없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족보 어디에도 사망 기록이 없다. 같은 시대 화가 김홍도는 죽음 이후에도 제자, 재산, 묘소 기록이 남아있는데, 신윤복만 없다. 왜일까? 도화서에서 퇴출되고 그저 처량히 지내다 생을 마감했다는 기존 설명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1811년 ‘조선국혜원’이라 턱하니 자기 이름을 내건 그림을 그린, 조선 최고의 화원이 고작 몇 년 뒤 행방불명이라면? 이는 국외 이탈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나는 이를 단정이 아닌 가설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만약 그가 그 배에 탔다면? 그는 그 그림만 가져갔을까?
6장. 그는 그 그림만 가져갔을까? - 춘화 포트폴리오 상상 그 이상을 넘어
본고는 여기서 상상을 클라이맥스로 확장한다. 물증이 없으므로 발칙한 상상 그 이상으로만 제시한다.
만약 1811년 대마도행 배에 신윤복이 피씨 역관의 인척으로 몰래 탔다면, 그는 『고사인물도』 한 장만 가져갔을까? 외가 역관 피종정, 화원 신윤복, 이 둘은 외삼촌과 조카의 관계이나 1811년 당시 신윤복은 만 53세였으며 그의 어머니 홍천 피씨 가문의 외삼촌뻘인 역관 피종정 역시 사료상 정확한 생년은 없으나 가계 구조상 5∼10살가량 위인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의 중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생의 숱한 경험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농후한 중년들이었다. 중인의 신분이었으나 그들에게 일본은 조선의 신분제가 적용되지 않는 외국인이었을 것이며 설사 신윤복이 일본어를 못한다 할지라도 외삼촌 피종정이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역관이었기에 현재 우리가 쓰는 매니저, 비즈니스 디렉터로서 함께 동행할 수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상상해보라. 60대 초반 혹은 50대 후반의 외삼촌과 50대 초반의 조카, 두 농후한 중년이 일본의 이자카야 한 칸에서 슌가를 팔고 일본 최고의 오이란과 술을 마시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조선에서는 천대받던 중인과 쫓겨난 화원이었지만, 그곳에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외국인 바이어와 조선 최초의 글로벌 아티스트였다는 것이다.
그는 춘화를 그리다 도화서에서 쫓겨난 천재 화가다. 조선에서 춘화는 유배 대상이지만, 일본에서 슌가(春画, spring picture)는 최고가 장르였다. 호쿠사이, 에이젠, 쿠니사다 모두 슌가로 돈을 벌었다. 내가 처음 보았던 그림 한 장, 용 문양 우치카케를 입은 오이란. 그 문화 자체가 춘화와 연결되어 있다.
조선통신사가 오면 반드시 환대연(歡待宴)이 열린다.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공식적인 외교용 선물인 『고사인물도』 외에, 은밀히 가져온 그림 한 장을 꺼내지 않았겠는가? 일본 다이묘들은 조선식 춘화에 환장했다. 배고픈 천재가 일본에 간다면, 당연히 또 다른 조선식 춘화 포트폴리오를 가져갔을 것이다.
상상해보라. 대마도 왜관 방 한 칸, 혹은 이즈하라에서의 환대연이 끝난 뒤 이어진 은밀한 술자리에서 피씨 역관이 일본 공방주에게 보여주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다이묘의 도움으로 일본 내 다른 지역, 오사카·에도행 배편을 얻는 과정에서도 이 춘화 한 장은 가장 강력한 명함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 최고 화원의 춘화"라는 소문이 오사카까지 퍼진다면, 교토까지 퍼진다면, 에도까지 퍼진다면 일본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춘화라는 특성상 극비로 진행되었을 것이며, 조용히 아주 조용히 진행될 극비 프로모션 같았을 것이다.


왼쪽: 신윤복 <월야밀회>, 오른쪽: <주유청강> / 혜원전신첩(혜원풍속도첩) 중 - 간송미술관 소장 / 1805년경
『고사인물도』가 공식 절차에 따른 외교용 선물이었다면, 또 다른 하나는 한복 치마를 들춘 여인, 수풀 속 남녀, 농염한 눈밑 점, 베로 남색 치마와 연지·베니 혹은 주사 입술이 쨍한 조선식 춘화첩 10장이다. 조선의 『춘화첩』 형식을 일본 슌가 형식으로 변용한 포트폴리오다. 예컨대 『월야밀회(月夜密會, 달밤에 몰래 만나다)』, 『주유청강(舟遊淸江, 맑은 강 위에서 배를 타고 노니는 뱃놀이)』 등 신윤복 춘화첩에 등장하는 구도를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바꾼 그림이었을 것이다. 이제 이해되지 않는가? 그 술자리의 춘화 한 장, 조선 스타일의 일본 슌가 한 장이 미칠 파격적인 효과를. 그를 연결해 준 다이묘에게도 신윤복에게도 둘 다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는 독특한 상황을 말이다.
물론 1811년 일본이라고 춘화가 합법은 아니었다. 에도 막부 말기, 사치 금지령으로 화려한 그림은 겉으로는 단속이었다. 하지만 신윤복이 발을 들인 곳은 겉이 아니라 속이었다. 조선이 양반 체면 때문에 춘화를 음지에서 처벌했다면, 에도는 달랐다. 금지령이 내려질수록 야시장(闇市場)은 더 커졌다. 에도 말기 사치금지령 때, 막부가 단속하면 거상들은 장사를 못 한다. 그때 장소를 제공하고 판을 깔아준 게 바쿠토 조직이다. 거상이 돈, 바쿠토가 주먹, 테키야가 유통. 이 셋이 합쳐진 게 훗날 야쿠자다. 막부의 눈을 피해 교토, 오사카의 거상들과 그들을 비호하던 이 조직들이 미인도와 슌가를 거래하는 거대한 지하경제를 만들었다. 그곳에선 단속이 곧 가격표였다. 금지될수록 더 비싸게 팔렸다. 금지하면 할수록 더 사고 싶게 만드는 인간의 욕망에 조선의 천재 화원 신윤복의 필체가 합쳐진 독특한 일본의 슌가가 등장한다면? 이건 엄청난 파격 그 자체일 것이다.
상상해보라. 그 야시장 한 켠, 등불 하나만 켜진 다다미방에서 일본 상인 조직의 두목 격인 거상이 신윤복의 그림을 펼치는 장면을. 그는 이미 혜원전신첩에서 조선을 그렸고 조선통신사 외교 선물로 중국 고사도를 그렸으며 이젠 일본 슌가를 그리고 있는 이 장면을 상상해보라. 이제껏 에도에서 본 적 없는 신윤복 스타일의 일본식 슌가이다. 같은 노골적임이라도 결이 다르다. 일본 슌가는 과장된 체위와 만화적 표정에 집중한다면, 신윤복의 슌가는 치마 끝자락, 수풀에 가려진 발목, 눈밑 점 하나, 베로 남색 치마와 베니 입술의 대비에서 뿜어져 나오는 농염한 아우라다. 은근하면서도 더 야하다.
진짜를 느낄 줄 아는 상인이라면 단번에 알아본다. 이것은 상품이 아니라 독점권이다. "조선 최고 화원의 춘화"라는 딱지 하나가 에도 지하경제 전체를 뒤흔들 명함이 된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묻지 않는다. 값을 묻지 않는다. 대신 문을 걸어 잠근다. 그날 밤, 신윤복의 10장 20장은 시장에서 사라진다. 거래된 것이 아니라, 은닉된 것이다. 모시지 못한다면, 아무도 못 가지게라도 하겠다는 심보다. 그래서 신윤복의 일본행은 극비 프로모션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 위험하고, 너무 비쌌기 때문에. 그의 작품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조선과 달리 일본엔 이런 거상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전엔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그린 그림이었다면, 그 이후는 그저 조선식으로 은근하게 야한 그림만 그렸을 리 만무하다. 너무 노골적이어서 일본에서도 유통이 어려웠거나, 혹은 도자기 그림이나 마쿠라에(枕絵, 베개 옆에 놓는 작은 에로 책자) 등 다른 형태로 변용되어 팔렸을 수도 있다. 혹은 역관 피종정의 집에 숨겨졌다가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런 그림은 대놓고 가져갈 수 없다. 조선에서 쫓겨난 이유 자체였으니까. 그래서 더 은밀히, 더 깊숙이 이 세상 속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솔직히 춘화로 관직에서 쫓겨난 조선 화가가 일본에 간다면 그저 풍경화, 산수화만 가져간다는 것은 경제적 상식에 맞지 않을 뿐더러 어불성설이다. 포트폴리오를 가져갔다는 상상은 충분히 타당하다. 그는 천재이자 생존형 예술가였으므로, 한 장이 아니라 10장, 20장을 가져갔을 것이다.
이 상상의 클라이맥스는 본고의 가설 2. 추가 작품 반출 가능성에 대한 미술사적 추정을 상상하게 하였다 물론 상상이지만, 1811년이라는 동일한 연대, 다이묘의 경제적 동기, 통신사 환대연이라는 무대, 그리고 일본에서 최고가였던 슌가라는 장르가 모두 맞아떨어질 때, 신윤복의 일본행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가 된다.
7장. 두 가지 가설 + 춘화 포트폴리오 가설의 통합적 고찰: 상상은 끝이 없다 - 판단은 독자에게
가설 1. 영향(影響) 가설 - 영감 가설이 성립하는 이유 (2장+3장 근거 통합)
본 가설은 확정하지 않는다. 다만 2장과 3장에서 확인한 사실들을 근거로, 영감·영향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1. 형태적 동일성 - 2장의 근거
첫째, 배경의 생략. 김홍도·김득신은 산수와 가옥으로 서사를 채우고, 우타마로·키요나가도 기둥과 창호를 그린다. 그런데 신윤복 《미인도》와 슌센 《용 문양 오이란》은 둘 다 배경을 백지로 지웠다. 조선과 일본에서 각각 파격으로 꼽히는 구도가 동일한 지점에서 만난다.
둘째, 의복 실루엣. 신윤복의 치마는 S자 곡선의 종형(鐘形)이다. 실제 한복이 아니라 곡선미를 극대화한 이상화다. 일본 우치카케의 정석은 원통형 수직 주름이다. 그런데 용 문양 오이란의 하단은 수직이 아닌, 한복과 동일한 종형 S자 곡선이다. 칼로 새긴 목판에서 이 부드러운 곡선을 구현한 것은, 일본 화공 집단 내부의 관성적 변형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3.3)
셋째, 세필 필습과 안면 조형. 홍색을 점처럼 찍어 올리는 농염한 채색, 극세필의 운용, 역삼각형 안면과 삼백안, 실제보다 두 배 높게 솟은 가체/마게. 두 미인은 같은 조형 어휘를 공유한다.
2. 안료와 기법으로 본 번역의 과정 - 3장의 근거
넷째, 안료의 선택. 신윤복은 《혜원풍속도첩》(1805년경)부터 주인공에게만 주사(쨍한 빨강)와 베로 남색(쨍한 파랑)을 쓰는 천재적인 색채 감각을 보인다. (3.1, 3.2) 슌센의 초판 《용 문양 오이란》(1810년경)에서 용은 고가인 베로 남색 대신 흑색이었다가, 1830-40년대 후판에서 비로소 쨍한 베로 남색으로 바뀐다. (3.4) 1830년대 아이즈리에 유행과 맞물린 출판업자의 재간행, 즉 유통의 지속성이다.
다섯째, 다른 점의 해석. 눈 밑 음영(눈물점)의 유무다. (3.5) 신윤복에겐 농염함을 더하는 필습이지만 슌센에겐 없다. 본고는 이를 기술적 한계로 보지 않는다. 고마즈리(胡麻摺り)로 점묘가 가능한 목판에서, 백옥 피부를 이상으로 하는 우키요에 규범상 선택적 생략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지워진 점 하나가, 오히려 번역의 증거가 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가설1을 세운다. 슌센이 신윤복 도상을 보고, 못 그려서 바꾼 게 아니라, 일본식으로 번역했을 가능성. circa 추정 연대이므로 1810년 이전 유입도 배제할 수 없다.
가설 2. 추가 작품 반출 가능성에 대한 추정 (5장+6장 근거 통합)
본 가설은 확정하지 않는다. 다만 5장과 6장에서 확인한 사실들을 근거로, 추가 작품 반출 가능성을 제시한다.
1. 중인이 갈 곳은 없었다 - 5.1, 5.2, 5.3의 근거
신윤복은 중인 화가다. 1800년 정조 사후 세도정치로 도화서 예산이 삭감되고, 성리학 이중잣대로 미인도·춘화는 단속 대상이 된다. (5.1, 5.2) 공식 관직 기록은 1805년경 『혜원풍속도첩』 이후 끊긴다.
법적·경제적 차이도 결정적이다. 조선에서 용 도상과 춘화는 처벌 대상이었으나, 일본에서는 용 문신이 멋의 상징이고 춘화(슌가)는 최고가 장르였다. 조선은 팔면 처벌받는 나라였고, 일본은 금지될수록 지하경제에서 더 비싸게 팔리는 나라였다. (5.3)
2. 1811년은 마지막 탈출구였다 - 5.4, 5.5, 5.6의 근거
1811년 신미통신사는 에도 입성 없이 대마도 엄원에서 끝난 불완전 사행, 역지빙례다. 이 불완전성이 구조적 틈이다. 정식 명단의 역관은 기록에 남지만, 권솔(權率) 자격의 사적 수행원은 공식 명부에 오르지 않는다. 정식 역관의 이탈은 외교 사건이지만, 권솔의 이탈은 사료에 남지 않는 구조다. (5.4)
외가 친척 역관 피종정(皮宗正)의 존재다. 중인 화원-역관 가문은 혼맥으로 얽혀 있었고, 역관은 왜관 라인의 밀무역을 담당했다. 그는 1811년 대마도 통역으로 배석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통신사 귀환 이후 공식 기록에서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본고는 그가 단순 통역이 아니라 외척을 일본 화방에 연결한 브로커였을 가능성에 주목한다. (5.5)
마지막으로 안료의 증거다. 신윤복은 이미 조선에서 부산 왜관을 통해 밀수된 베로 남색(베로藍)을 구해 덧칠 기법으로 쓰고 있었다. 200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청색은 그의 일본 시장 인지를 물질적으로 설명한다. (5.6)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가설2를 세운다. 만약 1811년 대마도행 배에 신윤복이 권솔 자격으로 탔다면, 외교용 선물인 『고사인물도』 한 장만 가져갔을 가능성은 경제적 합리성에 맞지 않는다. 추가적인 조선식 춘화 포트폴리오가 동반되었을 가능성. 물증은 없으므로 상상으로 제시한다.
8장. 결론: 두 개의 미인도는 모두 국보다
이 글은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왜 그의 죽음은 기록되지 않았는가.
혜원 신윤복. 조선 최고의 미인도를 그린 화원. 그의 몰년은 미상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승정원일기에도, 그의 죽음을 알리는 한 줄이 없다. 나는 그 공백에서 이 상상을 시작했다.
본고는 진실을 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신윤복이 일본에 갔다는 물증은 없다. 그래서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기록되지 않은 공백에, 그림이 남긴 흔적들을 총체적으로 기록했을 뿐이다.
베로 남색의 쨍한 발색, 한복처럼 부풀어 오른 우치카케의 종형 실루엣, 배경을 지운 파격, 그리고 천재의 필력은 좁은 시간폭에 붕괴되지 않는다는 상식. 하나하나는 우연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한 화가의 한 시기에 집합적으로 나타날 때, 나는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이 질문에 도달했다.
누가 누구의 카피인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그림이 모두 국보급 걸작이라는 사실이다.
간송미술관의 《미인도》가 한국의 보물인 것처럼, 대영박물관의 《용 문양 우치카케를 입은 오이란(흑룡본)》은 일본 미학의 정점을 찍은 국보급 걸작이다. 비록 목판화라는 특성상 1810년경 흑룡본과 후판인 1830-1840년경 청룡본을 모두 국보라 칭할 수 없더라도, 그 안에 담긴 미적 성취는 국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개인적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 Legion of Honor에서 소장한 청룡본을 더 선호하지만 말이다. 내 머리속에 박혀버린 그 쨍한 파랑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두 미인도 모두 각자의 나라에서 국보로 대우받아야 마땅하다. 본고는 그 두 걸작이 어쩌면 같은 뿌리에서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한 디지털 크리에이터의 상상을 기록한 것이다.
이 글이 한일 간의 갈등이 아닌, 그림을 더 자세히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증거가 없으므로 본고는 상상으로 남는다. 향후 X선 형광 분석과 목판 수종 분석, 대마도 종가 문서의 재조사를 통해 이 상상이 검증되거나 반박되기를 기대한다.
마지막 상상 하나만 덧붙이며 글을 닫는다.
1811년, 대마도. 불완전한 통신사의 마지막 밤. 일본 다이묘가 주최한 연회 자리. 술이 오른 조선의 역관과, 그 곁에 앉은 조선 최고의 화원.
그 화원은 정말 선 하나 가볍게 그은 선수화(線手畵)만 보여주고 돌아왔을까.
술자리의 짙은 농담 속에, 품속에서 살짝 꺼내 보인 그림 한 장은 없었을까.
"조선에는 이런 그림도 있다"고.
그 한 장이 밀무역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한 장이, 두 미인도를 닮게 만든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진실은 모른다.
다만 나는, 내가 만약 신윤복이었다면 갔을 것이다. 예술가로서 그림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곳, 안료를 마음껏 구할 수 있는 곳, 무엇보다 자신의 미인도를 알아봐 줄 수 있는 곳으로.
그 당시 그에게 신세계는, 일본이었을 것이다.
9장. 연구 윤리 서술
본인 aushanelee는 비운의 조선 천재 화가 신윤복의 죽음이 미상인 점에 착안하여 충분히 일본으로 갈 수 있음을 상상하였다. 돈 벌고 먹고 살아야 하므로. 중인으로 태어나 성리학의 이중잣대 속에서 예술가의 척박한 삶을 살다 퇴출된 그의 삶, 그 굴곡을 알기에 일본행 설은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 미상 시점에 그의 화풍을 연상시키는 국보급 걸작이 일본에서 등장하는 점, 조선의 쇠락 시점과 맞물린 점, 1811년 마지막 통신사가 대마도에서 끝난 불완전 사행이었다는 점, 외가 역관 피종정이 대마도 수행 후 사라진 점에서 출발한 가설이다. 일본인의 작품을 폄훼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그의 그림 속에서 신윤복의 특징을 알게 되어 내린 가설일 뿐, 기만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나는 어쨌건 이 그림에서 신윤복의 미인도를 일본 스타일로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조선에선 춘화로 쫓겨난 인정 받지 못한 천재였다면, 일본에선 춘화로 인정받을 수 있는 천재가 됐을 뿐더러 돈과 재물을 한 번에 거둬들일 수 있었다는 경제적 상상까지 덧붙이며 이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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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tish Museum, Collection Online, Oiran wearing black uchikake with dragon mot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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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on Collection, Woodblock Prints Database, Katsukawa Shunsen, Kakemono of an oiran in a black uchikake decorated with a dragon in a night sky [1810c Shunsen line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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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hams, London, Japanese Woodblock Prints, 5 Nov 2009, Lot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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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aluable, Auction Database, Katsukawa Shunsen Kakemono-e sales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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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pedia, Katsukawa Shunsen biography, late 1820s ceased prints and devoted to cera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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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lino, Katsukawa Shunsen - Ukiyo-e Print Designer and Ceramic Pa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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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on Tongsinsa Wikipedia, 1811 Tongsinsa incomplete Tsu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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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학회, 1811년 신미통신사 정사 김이교의 관복 고증, 朝鮮通信使硏究 Vol.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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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국보·보물 지정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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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족보, 동래부 왜관 별차 명부, 대마도 종가 문서, 피종정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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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순조실록, 도화서 관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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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송하맹호도》《죽하맹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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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혜원풍속도첩》《미인도》
에필로그: 불타지 않은 그림을 찾아서
얼마나 그의 춘화가 야했길래 도화서에서 쫓겨날 정도였을까?
정말 궁금하다. 너무 보고 싶은 그림이지만 현존하지 않은 그림일 뿐이다. 조선의 유명한 기생 황진이(黃眞伊, 1506 ~ 1567)처럼, 그녀는 글 뿐만 아닌 그림 실력도 출중하였다고 전해지지만 현재 그녀의 그림 한점 남아있지 않은 한국 아닌가? 조선에서 그녀는 천민이었고 신윤복은 중인이었다. 더 말할 이유가 있는가?
이 글은 논문이 아니다.
서론, 본론, 결론의 형식을 빌렸을 뿐, 학술적 완성도는 0점짜리 가황설이다.
나는 한 가지를 상상했다.
만약 혜원 신윤복이 1811년, 세상의 손가락질과 기록 말살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면.
1811년은 마지막 조선통신사가 대마도를 다녀온 해다. 혜원의 마지막 그림 기록도 그 즈음에서 끊긴다. 통신사 화원으로 편입되었든, 왜관의 상선을 탔든, 사라지기에 가장 그럴듯한 해가 1811년이다.
천재는 어디서든 그림을 그린다. 어떻게 살든 티가 날 수밖에 없다.
그가 일본의 어느 절간, 혹은 왜관의 다다미방에서 붓을 잡았다면, 그는 분명 일본 춘화의 문법이 아닌, 조선의 문법으로 야함을 그렸을 것이다.
나는 그 흔적을 찾아 일본에 현존하는 춘화를 검색했다. 그리고 곧 한계에 부딪혔다.
춘화는 박물관의 유리관에 있는 유물이 아니다. 300년간 다이묘의 비밀 서랍에서 긴자의 개인 소장가 금고로, 은밀하게 계승된 사적인 역사다. 야한 그림이라는 이유로 인터넷에는 목록조차 없다. 그래서 증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글은 faction으로 남는다.
하지만 만약, 정말 만약 그랬다면.
그는 분명 이렇게 그렸을 것이다. 이 그림처럼.

일본 춘화처럼 과장하고 비틀지 않고, 조선 여인의 치마폭처럼 대담한 대각선 구도로, 그리고 이 그림 속 여인의 치마에 쓰인 저 쨍한 색, 서양에서 막 들어온 베로(普魯) 남색으로.
쪽빛으로는 절대 낼 수 없는 색이다. 조선 회화에서 이 화려한 수입 파란색은 혜원풍속도가 그려진 1805년 전후에야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 이전의 조선 그림에는 존재하지 않던 색, 그래서 이 파랑은 곧 시간의 증거다. 1805년 이후의 천재만이 쓸 수 있던 색.
한국에는 그의 춘화가 없다. 전부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남아있다는 몇 점은 수위 낮은 풍속화일 뿐, 그의 진짜 욕망과 천재가 담긴 진짜 춘화는 한 점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래서 나는 거꾸로 묻는다.
한국에 없어서 불태워진 것이라면, 일본에는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주사거배, 신윤복 (1805년경)
이 글을 읽고 계신 일본, 그리고 세계 각국에 계신 개인 소장가분들께 간곡히 부탁드린다.
선은 칼처럼 담백한지, 여인의 얼굴은 조선식인지, 그리고 치마에 저 베로 남색이 쓰였는지.
혜원의 스타일로 그려진 춘화는, 분명 존재할 수 있다.
불타지 않은 한 점이, 어딘가에.
당신의 수장고에 있는 작자 미상의 춘화 한 점을 다시 봐주십시오.
조선 후기 화가 신윤복의 호는 혜원(蕙園)이다. 현재 통용되는 정설은 혜원을 혜초정원(蕙草庭園), 즉 '평범한 풀 정원'이라고 풀이한다. 스스로를 낮추어 처량하고 평범한 풀에 비유한 자학의 호라는 것이다. 그러나 aushanelee는 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조선이라는 성리학적 시선으로 읽은 결과이며, 유교적이지 않은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그림을 불태우고 기록에서 지워버린 시대가 만든 또 하나의 저주이기 때문이다.
1. 한자의 본의(本義)
사전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
蕙(혜)는 첫째로 혜초, 즉 풀을 뜻하지만, 둘째로 향초(香草)를 뜻한다. 난초과의 귀한 식물로, 공자와 굴원이 '군자의 향기'에 비유한 풀이다. 은은하지만 사라지지 않고 오래 남는 향, 그림을 보고 난 뒤 남는 여운을 뜻한다. 이와 관련된 고사는 모두 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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蕙質蘭心(혜질난심): 난초와 같이 아름답고 고결한 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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蕙心紈質(혜심완질): 마음은 혜초처럼 향기롭고, 자질은 흰 비단처럼 고운 사람. 당대 최고의 기생과 才女에게 붙이던 최고의 칭찬이다.
園(원)과 苑(원)의 차이 - 그리고 혼용
원래 도장에는 園이 쓰였다. 朝鮮國蕙園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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園(동산 원): 울타리 안의 과수원, 채소밭. 평범하고 소박한 밭. 누구든 가꿀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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苑(동산 원): 왕실의 원림(苑囿). 온갖 진귀한 동식물과 아름다운 것을 모아놓은 국가 최고의 컬렉션, 즉 전당(殿堂). 학문을 연구하는 곳.
중요한 것은 조선 후기에는 이 두 글자가 발음이 같아 문서에서 자주 혼용되어 쓰였다는 점이다. 신윤복이 스스로 園이라 썼더라도, 그가 담은 정신은 園이 아니라 苑에 가깝다.
苑(원) 역시 첫째로 정원을 뜻하지만, 둘째로 왕실의 원림(苑囿)을 뜻한다. 온갖 진귀한 동식물과 아름다운 것을 모아놓은 국가 최고의 컬렉션, 즉 전당(殿堂)을 의미한다.
藝苑(예원), 文苑(문원), 畵苑(화원): 예술, 문학, 그림이 모인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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閨苑(규원): 아름다운 여인들이 모인 정원, 신윤복의 작품 세계 그 자체이다.
따라서 혜와 원을 결합하면 '처량한 풀밭'이 아니라, '향기로운 것들이 모인 예술의 전당'이라는 뜻이 된다.
그는 園이라 썼으나, 우리는 이제 苑이라 읽어야 한다. 혜원(蕙苑) 신윤복으로
2. 새로운 해석
신윤복은 평생 기방을 출입하며 당시 양반 자제들과 어울렸던 화가였다. 월하정인(月下情人), 주유청강(舟遊淸江), 연소답청(年少踏靑) 등 그가 그린 것은 조선에서 가장 화려하고 값비싼 순간들이었다. 값비싼 안료를 아낌없이 쓴 그의 그림체 또한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자기 브랜드인 호에 스스로를 '평범한 풀'이라 칭하는 예술가는 없다.
혜원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
'나의 갤러리(苑)에 향기로운 여운(蕙)이 머무른다'
'향기로운 풀이 은은히 내 컬렉션에 머무른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글로벌한 시선으로 읽으면 다음과 같이 확장된다.
"전 세계를 정원으로 삼겠다"
어느 기생이 그의 그림을 보고 "당신의 그림은 마치 혜원 같습니다. 그 정원을 걷는 듯합니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 한마디가 호가 되었을 것이다. 누가 지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숨은 뜻이다.
우리는 이제 혜원을 다시 불러야 한다. 그는 園이라 썼으나, 나는 이제 苑이라 읽는다.
처량한 풀로 둔갑하여 지워진 혜원이 아니라, 향기로운 갤러리를 가졌던 예술가, 전 세계를 정원으로 삼고자 했던 조선 최초의 글로벌 아티스트 蕙苑! 신윤복!
혜원(蕙苑) 신윤복의 호(號)에 대하여
2026년 9월 28일
aushanelee 드림

"아무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느낀다. 그라면, 더 넓은 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 aushanelee ✍️